배우적인 느낌의 네 번째 오디션 - 3

000번 배느님씨! "......네!"

 

처음으로 내 이름이 호명되었다. 당황스러운데 기뻤다. 친구를 원망한 게 미안했다. '그러고 보니.. 노래해야 되는데?' 걱정이 되기도 했다. 홀린 듯이 내 자리로 가 반주를 녹음할 악보를 챙겨 반주자에게로 갔다. 그리고 내가 가져간 자유곡 반주가 연습실에 울려 퍼진다. 


노래까지 하고 오면 좋겠다는 기대는 하고 갔지만 정말 노래를 하게 될 줄을 몰랐다. 

 

그리고 내가 평소에 내기 힘들던 음역대의 노래를 가져가지 않고, 내가 편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선택했지만 심사위원의 입장에서는 그다지 큰 메리트가 없는 노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넘버의 애드립 부분을 수정해 더 다이나믹한 노트들로 준비를 해갔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노래를 잘부르고 못부르는 것 보다는 내 이름이 처음으로 오디션장에 '합격자'라는 이름으로 울려퍼졌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누가 보면 국가대표선발이라도 된 줄 알겠지만 이제 겨우 1차 오디션의 안무오디션 통과에 불과했다. 그래도 4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 중 10명 남짓한 인원 안에 들었다는 사실이 그 동안 연습해온 시간들에 대한 자그마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더 '즐기고 나오자'라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우리 타임에 뽑힌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내 순서는 금방 돌아왔다. 첫 번째로 오디션 장 바깥 문 의자에서 대기를 하고, 한 명이 들어간 뒤 오디션 장 들어가기전 통로 대기실로 들어갔다. 거기서는 앞 참가자의 노래가 울려 퍼져 들을 수가 있었다. 가사를 버벅대지만 참가자의 노래에는 에너지가 넘쳤고 어떻게든 그 노래를 끝까지 이어나가는 모습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그 다음 차례, 내 앞 번호의 참가자와 함께 오디션장으로 들어갔고 그 참가자는 밝은 에너지와 함께 노래를 시작했다. 그가 선택한 넘버는 킹키부츠의 'Land of Lola'. 그는 심사위원들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끼를 부리며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른 템포의 팝스타일의 뮤지컬 넘버를 가져왔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내 노래가 너무 우울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템포에 맞춰서 리듬을 타고 참가자의 노래를 즐겨주었다. 즐기는 심사위원, 아니 심사위원을 즐기게 한 그의 모습에서도 존경심을 느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의자에서 일어나서 중앙지점으로 가는 그 순간까지,

 

'머리라도 더 자르고 올 걸,

이쁜 옷이라도 챙겨올 걸,

목 좀 더 풀고 올걸,

더 신나는 노래 가져올 걸,

노래 연습 더 할 걸..' 

 

왜 이런 도움안되는 '걸걸'한 생각들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 참가자가 잘하면 자신의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 굉장히 아마추어 같은 발상과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 순간 내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이미 내 자신을 깍아내리며 심사위원들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참가번호 000번 배느님입니다. 제가 부를 넘버는 '네 곁을 지켰어'입니다."

 

반주가 시작된다. 

 

기계처럼 호흡이 지나가고 성대가 울린다. 이 넘버는 <넥스트 투 노멀>에서 댄이 미쳐가는 다이애나의 전기치료 제안을 받고 자신의 처절한 삶과 외로움을 울부짖는 노래인데 앞의 즐거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바보같은 생각으로 이 넘버를 밝게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심사위원의 눈을 쳐다보고 노래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그 뒤에 붙어있는 제이미 현수막 속 드랙퀸으로 분장한 제이미의 얼굴을 보며 노래를 불렀다.

 

제이미야, 너는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그렇게 환하게 웃고있니?

 

앞에서 김문정 음악감독님과 안무감독님이 서로 뭔가 이야기를 하시고 웃는다.

안 보이는 척 하지만 그게 다 눈에 들어오는 걸 어떡해! 이게 너무나 확실하게 잘보이는 게 지금의 내 현주소인걸?

 

'이렇게 우울한 노래를 가져오다니?'

'빠마를 어디서 했길래 저렇게 빠글빠글 할까?'

'초록색 츄리닝 바지에 초록색 상의라.. 패션테러를 하고 있군!'

 

오만가지 생각이 들며 드디어 노래의 애드립 부분까지 와버렸다.

그리고 내가 노래의 다이나믹을 생각하며 넣은 노트를 부르는 순간.. 그 순간을 못참고 나와버린 나의 사리...

 

삑사리..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도망치듯 나왔다. 삑사리도 당연히 날 수 있는 건데, 난 아직 내 삑사리의 부끄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운가 보다. 노래를 부르러간 친구를 기다리고 그 친구의 오디션이 끝나고 우리는 그 오디션장을 빠져나왔다. 해가 하늘 위에 떠 있었고, 일터로 간 사람들은 일상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그렇게 나의 네 번째 오디션은 끝이 났다.

 

친구와 오디션 얘기를 하면서 강남에서 오랜만에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 동안 못나눈 얘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무대에서 만날 날을 약속하고, 결과야 어찌됐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길 다짐하며 헤어진다. 

 

처음으로 내 이름이 불린 오디션.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일말의 가능성을 느낀 오디션.

오디션? 별거 아니구나. 그런데 더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똑똑하게 준비해야겠구나 라는 걸 느낀 오디션이었다.

비록 2차 오디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그럼 뭐 어때?

더 연습하고 내 매력을 개발시켜서 다음엔 더 많이 올라가면 되지.

 

조급하게 굴지말자. 멀리 내다보자.

정이 떨어져 미련 없이 떠날 땐 떠나더라도 미련 한 톨이 후회가 되지 않게 내 모든 걸 불태우자.

난 스타가 되려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니까.

내 눈을 멀게할 수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고 슬퍼하지말고 좌절하지 말자.

 

나는 오늘도 오디션 지원서를 쓰고

연습실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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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적인 느낌(@feel_like_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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